<십사만사천과 셀 수 없는 무리>
계7장과 계14장에 기록되어 있는 십사만 사천의 수가 하나님께서 인을 쳐서 선택하신 하나님의 택한 받은 백성들의 수라는 것에는 예수 믿는 성도들 중에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계7:4, 계14:1-3)
십사만 사천은 땅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인(성령)을 맞아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이다. 그리고 이들 십사만 사천은 하나님의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배워 하나님을 찬양한다. 중요한 것은 십사만 사천은 땅에 살면서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고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 구속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고 그 입에는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라는 것이다.(계14:3-5)
계7:4절에서 십사만 사천의 인 맞은 자와 계14:1절에서 그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 있는 것과는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고후1:22절과 엡1:1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성령의 인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이 십사만 사천이라고 하지만 이 수가 택한 백성의 상징적인 수인지 문자 그대로 십사만 사천 명인지 묻는다면 누구도 쉽게 대답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7:4절과 계14:1절과 3절에서 택함 받은 성도의 수가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는 사람은 성경 적으로 말할 때 분명히 십사만 사천 명이다. 이 십사만 사천은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이고(계20:15,계21:27), 천국의 혼인잔치에 참여한 자들이고 예복을 입은 자들이고(계19:9), 예수의 피로 죄 씻음 받은 사람들이고(계7:14), 계14:4-6절에 의하면 이들은 여자로 더불어 자기를 더럽히지 않고 정절이 있는 사람이고,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이고, 그 입에는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고 영원한 복음을 가진 자들이다.
그러니까 천국에 들어갈 십사만 사천이 상징적이든 문자 적이든 이들의 신앙은 이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예수께서 인도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는 예수의 종들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자기의 생명까지도 내어놓기까지 한다(계6:9-11). 그렇다면 십사만 사천은 과연 상징적인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의 수인가? 문자 그대로 십사만 사천의 수인가? 계7:4절에 의하면 구원받은 십사만 사천 명의 숫자가 이스라엘 각 지파 중에서 하나님께 인 맞은 자들이다.
이스라엘 각 지파 중에서 하나님의 인을 맞은 자가 각 지파에 일만 이천 명씩 합해서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했는데(계7:5-8), 이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계7장에서의 십사만 사천은 구약의 택함 받은 성도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계7:9절에서 흰옷을 입은 셀 수 없는 무리들이 어린양을 찬양하고 있는데 여기서 셀 수 없는 무리는 누구라고 할 수 있는가? 흰옷을 입은 자들은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구원받은 자들이다.(계7:13-14) 문제는 계7:4절에서 구원받은 자가 십사만 사천 명과 계7:9절에서 흰옷을 입은 셀 수 없는 무리가 같은 사람인가 다른 사람인가 이다.
십사만 사천 명과 셀 수 없는 무리와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가?
구약에서 하나님이 열두 지파를 선택하신 것은 야곱의 열두 아들을 축복하신 언약 때문이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선택의 숫자이다. 그렇다면 십 사만 사천이 흰 옷 입은 셀 수 없는 무리들과 동일한 사람들인가? 동일하다면 왜 따로 분리해서 십사만 사천이라고 하고 셀 수 없는 무리라고 하는가? 한꺼번에 셀 수 없는 무리들이라고 하든지 십사만 사천이라고 하든지 하지 않고 왜 나누어서 하나님의 택함 받은 성도들을 설명하고 있는가?
계7장에서 십사만 사천과 셀 수 없는 무리들을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는 이유는 그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다. 어떻게 다른가? 십사만 사천은 구약의 택함 받은 무리들이라고 할 수 있고, 셀 수 없는 무리는 계7:4-8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인 맞은 십사만 사천을 포함한 하나님의 택함 받은 무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는 이유가 십사만 사천은 구약적 표현으로서 계7:4-8절 말씀 그대로 열두 지파의 택한 받은 백성들이고 흰 옷 입은 셀 수 없는 무리들은 창15:5절에 나오는 아브라함 언약을 이루는 차원에서 셀 수 없는 표현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십사만 사천이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상징적인 수이다. 즉, 계7장에서의 구약에서의 택함 받은 수가 십사만 사천 문자 그대로의 수가 아니라 택함 받은 무리들의 수로 표현하여 상징적으로 십사만 사천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계7장의 십사만 사천과 흰 옷 입은 셀 수 없는 무리를 동일하게 보는 관점도 있는데 여기서 구약의 열두 지파와 신약의 열두 제자를 곱하고 거기다가 천을 곱해서 십사만 사천이라는 수를 만드는데 의도는 좋지만, 계7장의 십사만 사천은 분명히 구약의 열두 지파에 속한 택함 받은 성도 일만 이천 명씩이라고 명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흰 옷 입은 셀 수 없는 무리가 구약의 성도와 동일한 인물들이라는 것은 성경 적인 관점이라기보다는 선입견을 전제로 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계14장에서의 십사만 사천도 구약의 이스라엘 택한 백성인가?
그렇지 않다. 계14장에서의 십사만 사천은 땅 위의 구원받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할 수 있다. 계21:11-17절에 보면 천사가 성곽을 척량 할 때 십사만 사천 규빗이 나오는데 이 십사만 사천 규빗의 의미는 구약의 열두 지파와 신약의 열두 사도들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구약 모든 하나님의 택함 받은 성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천사가 성곽을 척량 하는 일은 계11장과 슥2장과 겔40장에서 언급하였듯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척량 하는 것이다.
그리고 롬11:25-26절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나오는데 25절의 이스라엘은 혈통적 이스라엘이고 26절의 이스라엘은 이방인을 포함한 새로운 이스라엘 즉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 오신 후에 예수 믿지 않고 죽은 유대인을 구원의 범주에 넣을 수는 없는 일이다. 구약에서 제사장이 드린 제사도 예수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죄 사함을 얻지 못한다.(히8:5-7,히9:9-10, 히10:4-5) 예수가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고 예수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요14:6) 할례도 무 할례도 아무 것도 아니고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다(갈6:15) 그러므로 롬11:26절의 이스라엘은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닌 예수 안에서 선택된 새로운 이스라엘이다.
그러므로 계시록에 나타난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 십사만 사천은 분명히 상징적인 수이기는 하지만 계7장에서의 십사만 사천과 흰 옷 입은 셀 수 없는 무리와는 같은 무리들이 아니라 구별되었다고 볼 수 있고, 계14장에 기록되어 있는 십사만 사천과 계21장에 기록되어 있는 십사만 사천 규빗은 땅위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구원받은 성도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계7장에서의 십사만 사천을 흰 옷 입은 셀 수 없는 무리들과 동일하게 보는 것을 반드시 잘못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십사만 사천이 흰 옷 입은 셀 수 없는 무리들이라고 하는 간접적인 성경적 근거도 없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십사만 사천과 셀 수 없는 무리들이 동일한 택함 받은 백성의 다른 표현이라고 한다고 해서 성경해석에 큰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보다 명확한 해석을 위해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좋기 때문에 계7장의 십사만 사천과 흰 옷 입은 셀 수 없는 무리와 계14장에서의 십사만 사천을 구분해 주는 것이 더 좋다고 할 수 있다. 같은 수와 같은 단어라고 해서 무조건 같지는 않다. 단어와 문자의 의미를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십사만 사천이 시온 산에 어린양과 함께 서 있다는 것이다. 십사만 사천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무리들이라고 했다. 이들이 시온 산 즉 새 예루살렘에 서 있는 이유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백성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상을 보여주는 이유는 현재 땅에서 고난 받고 있는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들의 결국이 어떠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다섯 천사의 등장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 질 수 있다. 즉 승리한 십사만 사천의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승리를 보다 분명하고 확실하게 해 주기 위해 등장하는 천사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도는 땅 위에서 하나님 앞에서 왕과 제사장 노릇을 하는 자들만이 십사만 사천의 대열에 들어가 있는 택함 받은 성도들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즉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십자가의 길을 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삽입장>
어린양이 여섯째 인까지 떼고 난 이후에 일곱째 인을 떼셔야 하는데, 일곱째 인은 계8장에 나오고 일곱째 인을 떼기 전에 계7장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을 신학적으로 중간장 또는 삽입장이라고 한다. 삽입장은 계7장과 계10장과 계11장과 계12장과 계13장과 계14장이 삽입장인데 삽입장이 왜 들어가 있는가?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재앙 한꺼번에 나오고 삽입장 같은 것은 후렴부에 넣어도 되는데 왜 인과 나팔 중간 중간에 집어넣어 놓았는가?
계8:13절에 의하면 일곱째 나팔재앙인 대접 재앙은 세 번째 화로서 마지막 재앙이다. 그러나 첫째 화와 둘째 화는 일곱 나팔 재앙 중에서 다섯째 여섯째에 해당하는 재앙으로서 경고성 재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재앙들은 가공할 만큼 엄청난 재앙들이다.
그러니까 여섯째 인 재앙부터 불신자들에게 내리는 큰 재앙들인데 중요한 것은 신자가 이것을 보면서 이렇게 강한 사단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과 불신자들이 두렵지만 결국 그들이 멸망하고 재앙을 받는 것을 보여 주면서 신자들로 하여금 두려워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신자가 승리한다는 확신과 믿음을 줌으로서 신자로 하여금 믿음의 선한 싸움을 끝까지 잘 싸울 것을 당부하고 격려하기 위해 이런 삽입장을 넣어 놓았다고 볼 수 있다. 신자의 위치와 믿음과 신분과 능력과 권세가 그들보다 강하다는 것을 각인시키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계7:1-8절까지는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치는 모습이 나오는데 먼저는 십사만 사천이 나오고 계7:9-12절까지는 구원받은 흰 옷 입은 셀 수 없는 무리들이 나오고 계7:13-17절까지는 이들이 어떻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해서 승리하였고 마침내 영광에 나라에 들어가는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
계9장에서는 첫째 화와 둘째 화가 나오지만 그들의 결국은 불과 유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계10장에서는 바다와 땅을 밟고 있는 천사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고 있고
계11장에서는 두 증인 나오는데 죽임을 당하지만 다시 살아남으로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계12장에서는 용이 패배하는 모습이 나오고
계13장에서는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나오지만 계14장과 15장에서 승리한 성도들과 어린양을 보여주면서 성도의 승리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삽입장을 통하여 신자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자녀 됨의 확신 즉, 악한 마귀가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마침내 승리한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는 것이다. 죽어도 이기는 승리, 이것이 신자의 승리이다. 롬8:31절 이하에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엇을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3절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35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그들이 받을 재앙의 말씀들을 보고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 안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이다. 이것을 놓치면 엉뚱한데 가서 벌벌 떨고 있게 된다. 성령을 받고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되어 내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확신을 놓치는 순간 마귀는 달려든다. 그들의 멸망을 두려워 말고 우리가 해야 할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요한은 악인의 멸망과 의인의 구원 두 가지 환상을 동시에 보고 있다.
여러분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안다면 이제 악인의 멸망에 두려워하지 말고 신자의 마땅히 할 일에 대해서 확신과 담대함을 가지고 싸워 이겨 나가는 일에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이다.
<단 지파와 에브라임 자파가 빠지고 요셉이 들어간 이유>
구약성경의 역사는 야곱의 열두 아들인 열두 지파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열두 지파는 구약성경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의 열두 지파의 형성과정은 일괄적이지 않고 수시로 변동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창49장의 야곱의 열두 지파 예언 속에 있는 단 지파가 계7장에서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은 택함 받은 십사만 사천의 무리 속에서는 빠져 있다 대신 요셉의 아들 므낫세가 들어가 있다. 그리고 구약 성경에서 레위지파가 제사장 지파로 하나님께 선택됨에 따라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열두지파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창48:5-6,민3:12-13)
그렇다면 에브라임 지파가 계시록의 택함 받은 무리 속에서 빠지는 이유는 요셉이 다시 들어갔기 때문이다. 요셉은 두 아들 대신 빠졌다가 왜 다시 들어갔는가? 그리고 요셉이 들어갔는데 요셉의 장자인 므낫세는 왜 빠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가? 구약성경에 나타난 열두 지파의 형성과정의 역사는 창49장과 신33:22절에 있는 야곱과 모세의 예언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언의 내용은 각각 다르지만 예언 성취는 빈틈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구약성경에 나타난 열두 지파의 역사를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야곱은 개인적으로 자식들을 예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영감으로 예언했기 때문이다(딤후3:16-16) 그러므로 말씀의 원칙에 의해 야곱의 예언은 반드시 성취된다고 볼 수 있다.(민23:19)
야곱이 단에게 어떤 예언을 하였기에 요한 계시록에서 단 지파가 빠졌는가? 창49:16-18절에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신33:22절에서는 “단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단은 바산에서 뛰어 나오는 사자의 새끼로다”고 했다.
단 지파의 멸망 예언은 삿18:30절에서는 “단 자손이 자기를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모세의 손자 게르손의 아들 요나단과 그 자손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그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니라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의 지은 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고 했다.
이러한 단 지파의 멸망 예언은 솔로몬 왕을 떠나 북쪽으로 열 지파를 이끌고 간 여로보암 왕이 단이라고 이름하는 곳에 두 금송아지 신상을 세워서 우상숭배를 했던 곳이기도 하다.(왕상12:28-30) 단이라고 이름하는 장소는 본래 라이스라는 곳인데 단 지파의 이름을 따서 단이라고 했다.(삿18:29) 단에서 단 자손이 자기를 위하여 새긴 신상을 만들고 우상을 숭배했다.(삿18:30) 이렇게 단이 야곱 예언을 따라 하나님의 아들의 발꿈치를 물게 됨으로 열두 지파에서 탈락이 되는데 그 대신에 므낫세가 들어간다.
에브라임이 빠진 이유는 삿8:1절 이하에서 에브라임은 기드온이 미디안과 싸워 이기고 왔을 때 기도온에게 자기들을 싸움에 나갈 때 부르지 않았다고 불평했었다. 그때 기드온이 시시한 우리들이 나가서 싸우는데 꼭 당신들과 같이 힘이 있는 사람들을 부를 필요가 있었겠느냐는 기드온의 겸손 때문에 넘어갔다. 그러나 삿12장에서 입다가 암몬 자손들을 쳐부수고 돌아왔을 때 전쟁이 겁이나 나가지 않았던 자들이 기드온에게 했던 짓을 입다에게 하다가, 입다가 에브라임을 쳐서 에브라임을 므낫세 중에 있게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삿12:4)
그러므로 요셉이 다시 열두 지파 대열에 들어가게 된 이유는 에브라임 대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열두지파 형성과정은 행1장에서 제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가룟유다 대신 맛디아를 넣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심어진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언약의 말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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