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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영혼의 양식

욕단의 후예들 2 창세기 10:25-30

서진35 2019. 3. 30. 08:50


김준식목사

오늘의 이 말씀은 환단고기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환단고기는 삼성기 상하와 단군세기, 북 부여기 와 태백일사를 모아 한 권으로 엮은 책입니다. 삼성기 상하는 인류의 창세 역사와 잃어버린 한 민 족 사의 국통 맥을 바로 세우는 근간이 됩니다. 삼성기 상은  신라 진흥왕의 손자인 진평왕 재위 시대 에 쓴 책으로 현존 역사서 중에 우리의 국통 맥을 밝힌 가장 오래된 역사서입니다.  불과 4 쪽에 불 과한 짧은 글이지만 인류의 시원 국가인 환국에서 배달, 고조선, 북부여를 거쳐 고구려와 신라에 이른 한 민족사의 맥을 압축하여 전하고 있습니다. 삼성기 하는 삼성기 상보다 좀더 상세 히 전하 며, 삼성기 하는 환국의 열 두 나라 이름과 배달의 18대 천황의 이름, 재위 연도까지 상 세히 전 합니다,


그리고 고조선사의 전모를 밝혀 주는 단군세기는 초대 단군인 단군왕검에서 47대 고열가 단군에 이르기까지 역대 단군의 이름과, 재위 년수, 업적과 사건 등을 중심으로 연대기 형식으로 기술한 고조선 2096년 동안의 고조선 역사를 전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단군을 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 는데 단군이란 고조선 때의 왕의 명칭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애굽의 왕들의 명칭을 바로라고 하듯 이 왕의 명칭입니다. 바로 느고는 애급의 느고왕이란 뜻입니다.  북부여기는 고조선을 계승한 북 부여와 북 부여에서 갈려 나간 동부여, 갈사부여, 서부여 등 여러 부여 사를 총체적으로 기록하여 부여사의 전모를 밝혀 줍니다, 북부여의 건국 시조 해모수의 실체를 처음으로 밝힙니다,


고구려의 시조로 널리 알려진 고주몽이 원래는 북부여 6대 고무서 단군의 사위로서 북부여 7대 단군이었다는 사실도 밝힙니다, 그리하여 북부여의 대통이 고구려로 이어졌음을 드러냅니다. 고 조선이 망하고 고구려가 세워지기 까지 만주와 대륙에서 여러 부여가 진행되는 한민족사를 다룬 역사서가 북부여기 입니다. 북부여기 덕분에 고조선과 고구려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인 부여사를 찾을 수 이게 되었습니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는 북부여기 보다 먼저 지어졌는데 이 책들은 나름 대로 부여 역사를 전하고 있지만 이 두 사서는 주요 사실을 오기하여 한 민족사의 국통 맥을 잘 못 전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오기 한 가지만 짚어 보면 삼국사기는 고주몽을 해모수의 아들로 기록하 였고, 삼국유사는 고주몽을 북부여의 5세 고두막 단군과 혼동하여 동일 인물로 기록하였습니다, 한 인물을 두고 두 책의 내용이 서로 다른 것 만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태백일사는 총 8권으로 구성되었는데 첫째 책인 삼신오제본기는 천상에 만물의 존재 근거인 삼 신이 계시고 그 삼신일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삼위일체와 유사합니다, 이 책을 쓴 저 자들은 당대의 최고 지성들이었습니다, 삼성기 상을 지은 안함로는 신라 진평왕 때의 도통한 승려 였습니다. 안함로는 진평왕 때에 수나라로 건너가 문제를 직접 만났습니다. 삼성기 하를 지은 원 동중은 고려 때 인물로서 학자이자 문인이었다고 합니다.  단군세기를 지은 이암은 고려사 열전에 오를 정도로 유명한 사람인데 이암은 고려와 조선 시대에 걸쳐 뛰어난 학자와 관리를 배출한 고성 이씨 집안의 9세 손이었습니다.


그의 증조부 이진은 고려 고종 때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학사로 역임하였고, 조부 이존비는 진 현과 대제학을 역임하였고, 부친 이우는 경상도 김해와 강원도 회양 부사였다고 합니다, 본인 이 암은 고려 공민왕 때에 현재의 국무총리 격인 수문하시중에 임명되었습니다. 북부여기를 지은 범 장은 고려 말의 충신이었던 정몽주의 제자였다고 합니다. 태백일사를 지은 이맥은 조선 초기 문신 으로서 단군세기를 지은 이암의 현손입니다. 이맥은 66세 때인 1520년에 실록을 기록하는 찬수 관이 되어 세조, 예종, 성종 때에 전국에 대대적으로 수거하여 궁궐 깊이 감추어 두었던 상고 역사 서를 마음껏 접할 수 있었습니다. 


이맥은 이 금서들을 통해서 알게 된 역사적 사실들을 정사에서 빠진 태백의 역사라는 뜻에서 태백일사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러나 중국을 사대하는 조선의 악습과 성리학에 위배되는 학설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 세태 때문에 책을 세상에 내놓지 못하고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집안에 비장했습니다. 이맥은 한민족의 왜곡 날조된 국통맥 을 확고히 바로 세운 불멸의 공덕을 세운 분입니다. 이맥의 태백일사는 고대로부터 한 민족이 섬 겨왔던 삼신일체 사상을 세상에 전한 인물입니다. 이 삼신일체가 우리 기독교에서 말하는 삼위일 체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적 안경을 가지고 이 태백일사를 연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로 단군왕검이 건국한 고조선
단군왕검이 38세에 천제의 아들로 추대되어 제위에 오른 때는 주전 2333년이었습니다. 단군왕 검은 조선의 개국 시조로서 삼신 상제님께 천제를 올리고 송화강유역(지금의 흑룡강성 하얼빈)의 ‘아침 태양이 빛을 비추는 땅’인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였습니다.  그 후 22대 색불단군은 이 송화 강 아사달에서 남서쪽의 백악산 아사달(지금의 길림성 장춘)로 천도하였고 44대 구물단군은 남 쪽으로 더 내려가 장당경 아사달(지금의 요령성 개원시)로 천도하였습니다. 도읍지의 이동에 따라 세 왕조의 변천을 거처 고조선은 마흔 일곱 분 단군이 2096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고조선은 신교(神敎)의 삼신(조화신, 교화신, 치화신) 가운데 만물의 질서를 바로잡는 치하신의 도 가 실현된 때입니다, 그래서 단군왕검은 삼신의 원리에 따라 나라를 삼한 즉 진한, 번한, 마한으로 나누어 다스렸습니다.  단군왕검은 요동과 만주 지역에 걸쳐 있던 진한을 통치하고 요서 지역에 있던 번한과 한 반도에 있던 마한은 각각 부 단군이 통치하였습니다. 삼한으로 나누었으니 도읍지 도 세 곳이었습니다, 고조선은 강대한 제국이었습니다, 고조선 영토는 동쪽으로 한 반도의 동해에 미치고, 북쪽으로는 흑룡강을 지나 시베리아까지 이르고, 남쪽으로는 큐수와 일본 본토까지, 서쪽 으로는 몽골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고조선을 고려와 조선의 중화 사대주의자들과 일제의 식민 사학자들이 한반도 북부에 국한된 소국으로 줄여 놓았습니다.
고조선은 동북아의 대국으로서 70여 개의 크고 작은 제후국을 거느렸습니다, 단군세기를 비롯하 여 제왕운기, 삼국유사, 고려사, 세종실록과 규원사화 같은 국내 문헌 뿐 아니라 중국 사서들에 그 사실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 역사책에 기록된 제후국만 해도 시라(길림), 고례 (고구려) 즉 고리국, 옥저, 부여, 예, 맥, 남국(북경부근), 숙신, 청구, 낙랑, 여,임둔, 현도, 고죽, 영 지, 수유, 엄, 서, 회, 추, 양이, 양주, 유, 진번, 졸본, 비류, 해두, 개마, 구다, 송양 등 30개국이 넘 습니다, 단군세기에 의하면 고조선의 단군은 제후국을 순회하였고 제후들은 단군에게 조공을 바 쳐 그 속국임을 자인하였습니다. 단군은 제후들을 불러 삼신 상제님께 올리는 천제에 참여시키고 함께 적국을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고조선과 중국과의 관계
단군세기는 고조선이 초기 단군 때부터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중국의 순임금 때에 중국의 국가존망이 달린 대 홍수를 당하였을 때에 고조선의 도움으로 보위에 오른 순 은 9년 동안 계속된 물난리를 고조선의 도움으로 해결했습니다, 중국 하 나라는 우임금이 세웠는 데 아버지 곤이 치수에 실패하여 순임금에게 처형 당한 후 그 자리를 이어 나라의 치수사업을 맡 아 보았는데 우는 순을 대신하여 도산회의에 참석하여 고조선의 태자 부루에게서 오행치수법이 적힌 금간옥첩을 받았고, 이 비법으로 홍수를 해결하고 인심을 얻어 나중에 하 나라를 열게 되었 습니다. 이 사실이 오월춘추, 역대 신선통감, 응제시주,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동사강목, 묵자 에서 확인됩니다,


개국 시조때부터 고조선의 은덕을 입은 하 나라는 마지막 군주 걸에 이르기까지 고조선을 상국 으로 모셨습니다. 하 나라에서 상나라로 중원의 왕조가 교체 될 때에도 고조선의 힘이 작용하였 습니다. 상 나라의 초대임금인 탕이 하 나라 임금 폭군 걸을 정벌하고자 하였을 때, 13대 흘달 단군이 처음에는 걸을 지원하였으나 걸의 포악한 정치가 개선되지 않자 결국 탕의 손을 들어 주 었습니다,  상 나라의 왕통은 동이족입니다.  상나라의 시조인 설의 어머니가 제비 알을 삼키고 설을 낳았다는 난생설화는 전형적인 동이족 탄생설화입니다.  동이족이 세운 동북방을 존숭하였 습니다.  상나라 말기의 도읍지였던 하남성 안양시 은허 유적에서 출토된 궁전, 성벽, 무덤들 모 두가 동북방을 향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동북은 삼신이 머무르는 땅이고, 상나라의 동북 방에 고조선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상나라를 은나라고 하는 것은 상나라의 마지막 도읍지가 은이었기 때문입니다,


상나라 다음으로 550년 동안 중원을 지배한 주나라는 일반적으로 한족(漢族)이 세운 나라로 알 려져 왔습니다.  그러나 창건자의 문왕과 무왕 부자는 그들의 시조 설화에서 알 수 있듯이 동이족 출신입니다. 무왕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많은 병력과 전차를 보유한 상나라를 무너뜨릴 수 없었으 므로 동이족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다수의 동이인이 무왕에게 협조했는데 강태공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왕은 주나라 건국을 도운 강태공을 산동반도 지역에 제 나라 제 후로 봉했습니다.  그 이유는 강태공이 주 왕실에 비협조적인 산동지역 동이족을 다스릴 적임자였 기 때문입니다.  환단고기에는 주 나라왕 하가 고조선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친 사실을 기록했 습니다, 

둘째로 고조선과 북방 민족과의 관계
단군세기에 고조선과 북방 민족 간의 관계를 알려 주는 귀중한 기록이 있습니다, 3대 가륵단군 6 년에 ‘임금께서 열양의 욕살, 삭정을 약수 지방에 유배시켜 종신토록 감옥에 가두었다.  후에 용서 하여 그 땅에 봉하시니 흉노의 시조가 되었다’는기록과 4대 오사구 단군의 재위 원년이 BC 2137 년에 자신의 아우 오사달을 ‘몽고리한’에 봉했다는 기록, 또 30대 내휴단군 5년에 흉노가 공물을 바쳤다는 기록, 32대 추밀단군 3년(AD 847)에 선비산의 추장 문고가 공물을 바쳤다는 기록 들 이 그것입니다. 몽골고원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남 러시아와 동 유럽에 이르는 임대에는 광대한 초원 지대가 이어집니다.  흉노, 선비, 돌궐 등 여러 북방 민족과 한 민족의 관계를 살펴 보면서 그들의 세력 부침을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고조선과 흉노족과의 관계
단군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흉노의 시조는 한민족인 동이족입니다, 흉노는 그 수가 계속 늘어나 진 나라 때 와서는 이미 오르도스와 몽골고원, 천산산맥 일대를 주름 잡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우리 가 추구하고 있는 욕단의 후예들입니다. 흉노를 그 우두머리를 선우라고 합니다. 이들은 한나라 초기 묵특선우 때에 서쪽은 월지와 동쪽의 동호(번조선, 내 몽고 동부)를 격파하고 아시아 최초의 유목 대제국을 세웠습니다, 묵특선우는 흉노제국을 신교  삼신문화의 고향인 고조선과 같이 나라 를 셋으로 나누어 다스렸습니다,  자신은 중앙을 통치하고 서쪽은 우현왕이 통치하고 좌현왕은 우현왕 보다 우대하였는데 보통 선우의 아들을 좌현왕으로 삼았습니다. 


흉노족은 선우를 탱리고도 선우라고 불렀는데 탱리는 하늘을 뜻하는 흉노어 탱그리의 음역입니다, 고도는 아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탱리고도는 하늘의 아들, 즉 천자란 뜻입니다. 몽골족들도 그 들이 섬기는 최고 신을 탱그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선우는 매일 해와 달에게 절하 고 게르(천막집)의 문도 동쪽을 향해 배치하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문을 동향으로 한 것은 동쪽을 중시하는 동이족의 관습과 일치합니다.  중국 역사서에서 흉노는 주전 4세기 전국시대에 처음 등 장했는데 중국 입장에서 볼 때에 흉노족은 틈만 있으면 연, 조, 진 나라를 침략하는 골칫거리 였습 니다. 이들 나라들이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는데 진나라 진시황에 이르러 만 리장성을 완성한 것입니다.  진시황은 만리장성 축조 때에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준 결과로 진승 과 오광등의 반란으로 망했는데 결과적으로 흉노의 위협이 진나라의 멸망 중 한 원인이 되었습니 다,


한 무제가 흉노를 공략할 때에 흉노 좌현왕의 아들이 자기 어머니와 함께 한나라로 포로가 되었는 데 이 흉노 왕자의 이름이 김일제입니다. 그후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 나라를 건국한 왕망이 김일 제의 현손이었다고 합니다, 이 왕망이 몰락할 무렵에 한 반도로 망명을 하였는데 문무왕 비문과 중국  서안에서 발견된 당나라 시대의 묘비명에 김일제가 신라 김씨 왕가의 조상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흉노족은 BC 1세기 중반에 내분이 일어나 둘로 분열 되어 호한야 선우가 이끄는 동흉노는 한나라와 동맹을 맺고 중국 북쪽에 머물렀지만, 한나라와 타협하기 거부한 질지 선우가 이끄는 서흉노는 중앙 아시아 쪽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 후 동흉노는 다시 북흉노와 남 흉노로 나뉘었고 한 때 일리가 근처 오아시스 국가들을 지배하 기도 했지만 선비족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2세기 중반에 더 서쪽으로 옮겨 오늘날의 카작스탄 초원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 후 북흉노는 기록에서 사라져 버린 듯했지만4세기 중반에 갑자 기 훈(HUN)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훈족은 370년 경에 흑해 북부 에 나타남으로써 처음으로 유럽에 그 존재를 알렸습니다.  이들은 볼가강을 건너 남러시아 초원지 대에 거주하던 알란 족을 공격했고, 이어 알란족과 함께 동고트족과 서고토족을 공격하여 유럽 대 륙에 대 민족이동의 물결을 야기하였습니다. 공포에 질려 도주한 게르만 족이 밀물처럼 로마 국경 안으로 몰려 들자 이를 제어하지 못한 서로마 제국은 결국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훈족에 의해 촉발된 게르만족 이동은 서양 역사에서 고대의 종말을 초래한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훈족은 이 시기 이후 거의 한 세기 동안 동서유럽 지역을 침략하여 유럽인들에게 커다란 공포심을 일으켰습니다, 훈족은 아틸라 대왕 때에 이르러 유럽 일대의 약 50개 족속을 거느리는 거대한 제 국으로 부상했습니다.  훈족이 통치한 거대한 나라를 훈 제국이라 부르는데 우랄산맥에서 동유럽 일대에 걸친 광대한 영역을 지배했습니다. 동방에서 출발한 흉노의 일파가 결국에는 세계사의 흐 름을 바꾸는 주역이 되었던 것입니다, 흉노족의 자취는 바이칼 호에서 알타이산맥, 몽골고원 일대 에 걸쳐 활동하던 기마민족이 세계사의 무대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가를 드러내는 첫 째 사례입니다. 


1973년 경주의 옛 고분에서 발견되어 세계를 놀라게 만든 황금 보검이 그 증거의 하나입니다. 이 보검은 동로마제국에서 제작된 것이라 합니다.  훈족의 연구가인 서울대학교 이종호박사는 훈족 의 아틸라 왕이 동로마에서 얻은 이 보물을 신라 왕실에 선사한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그 후 아틸 라 왕이 서로마를 정복하고 서로마 공주와 결혼한 그 이튿날 아침에 죽음으로 나타난 결과로 훈족 은 유럽에서 거품과 같이 사라집니다, 

고조선과 선비족
선비족의 침략을 피해 북 흉노가 1세기 말 멀리 중앙아시아 초원으로 떠나 버리자 흉노의 본거지 이던 몽골고원은 일시적으로 공백지대가 됩니다. 흉노의 지배를 받던 여러 유목 집단이 초원을 차 지 하기 위해 각축전을 벌였고, 결국 선비족이 패권을 잡고 북방지역을 통일하였습니다.  후한서 에는 선비와 오환을 모두 동호 즉 번조선의 후예라 했습니다. 이를 볼 때에 선비는 고조선에 속한 족속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선비족의 기원은 고조선에 속한 동북 지방이었던 것입니다. 선비족은 2세기 중반에 단석괴라는 영웅 밑에서 여러 부족이 하나의 국가로 되었다가 단석괴가 죽음으로 선비제국은 단순 간에 여러 집단으로 분열되었는데, 당시 한 나라가 망하고 동탁, 원소, 조조, 유비 등 군웅이 패권을 놓고 다투던 삼국시대와 그 뒤를 이은 위진 제국이 붕괴하여 중원이 혼란에 빠 지자 선비족은 그 틈을 타 북중국으로 밀고 들어갔습니다, 


탁발, 모용, 우문, 단, 걸복 등 선비족의 거의 모든 부가 남하해서 중국사에서 말하는 5호16국 시 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모용부는 전연, 후연, 서연, 남연 등을 세웠습니다. 탁발부의 대국이 다른 국 가들을 모두 정복하고 북중국을 통일하였는데 이 나라가 북위입니다. 북위는 북제, 북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이 북주의 귀족이었던 양견이 패권을 잡으므로 수나라가 탄생한 것입니다, 이 북주, 수나라의 뿌리는 선비족입니다. 중원을 통일한 수나라의 뿌리도 북방 유목민족인 동이족 인 것입 니다. 당나라를 세운 이연도 혈통이 선비족입니다. 이연의 조부 이호는 서위를 주도한 20 가문 중 의 하나로 선비족 출신입니다. 그러므로 수와 당은 그 기원이 선비족입니다. 5호 16국 시대에 유 목민들이 중국 본토로만 진출한 것이 아니라 한반도로도 적지 않게 진출했습니다. 선비족의 영향 으로 흉노족이 유럽에서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가져오고 중국에서는 북방민족이 중원을 장악 한 5호 16국 시대를 열었습니다. 

고조선과 돌궐족의 관계 
단군세기에 3대 가륵단군이 지백특에서 토벌하였다고 합니다. 지배특은 티베트를 말합니다. 18 대 동엄단군 때는 지백특 사람들이 공물을 바치려 왔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기록을 보면 고조 선의 활동영역이 티베트 인근까지 뻗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동양 고대사와 서양 중세사에 영향을 미친 민족인 투르크족이 바로 돌궐족입니다.  투르크족은 6세기 중반에 서쪽 카스피 해 에서 동쪽으로 몽골과 만주에 이르는 광대한 유라시아 초원에 강력한 제국을 세웠습니다. 오늘날 터키라는 이름도 바로 투르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동동궐족은 원래 몽고족 국가인 유연에 예 속되어 있던 집단으로 알타이 지역에서 주로 야금 일에 종사하였습니다. 철광석을 제련하는 기술 을 보유하고 금속가공에 뛰어난 기술을 보유한 돌궐족이 556년에 유연을 멸망시키고  돌궐국가 를 세워 흉노가 붕괴된 뒤 5백년만에 초원의 유목민을 다시 통합하고 나아가 유라시아를 아우르 는 제국을 세운 것입니다. 


돌궐제국을 세운 토문이 죽자 두 아들에 의해 동 돌궐과 서 돌궐로 나뉩니다. 카간이 된 형은 몽골 지역을 차지하여 동돌궐을 세우고 동생 이스테미는 중앙아시아 일대에 서돌궐을 세웁니다. 서 돌 궐은 사산조 페르시아와 협력하여 헤프탈을 쳐서 멸망시키고 동돌궐은 동쪽으로 거란 족을 복속 시키고 북쪽으로는 바이칼호까지 세력을 확장시키고 남으로는 고비사막을 넘어 북중국을 압박했 습니다. 그러나 나라에 자연제해가 겹치면서 당나라에 멸망합니다. 그런데 돌궐은 중국의 지배를 받은지 반세기 만에 제국을 다시 부흥시켜 세 부족 가운데 위구르가 몽골의 모든 유목민을 제압하 여 돌궐은 이후 제 2 돌궐 제국을 세웁니다. 


유목민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위구르가 망하고 서쪽으로 옮겨가서 이란 지역에 가즈나 왕조 (9 75-1187)를 세웁니다. 11세기에는 동로마 제국에 진출하여 셀주크 투르크제국(1037년)을 세우 고 14세기 말의 마지막 해 1299년에 오스만 투르크제국을 세우고 1389년에 소아시아를 통일 하고 발칸반도 대부분을 장악했으며 1453년에는 콘스탄티노풀을 점령하고 오스만투르크 대 제 국을 형성하여 1922년까지 이어집니다. 터키나라 사람들은 한국인을 자신의 형제나라라고 학교 교과서에서 가르친다고 합니다. 고구려와 돌궐은 동맹을 맺어 가깝게 지냈는데 돌궐이 위구르에 멸망한 후, 남아있던 이들이 서방으로 이동하여 결국 후에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건설하게 됩니다. 원래, 나라와 나라 사이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는 법이지만 돌궐과 고구려는 계속 우호 적이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를 '형제의 나라'라 불렀습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의 터키에 자리잡은 그들은, 고구려의 후예인 한국인들을 여전히, 그리고 당연히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6.25 참전과 올림픽 등에서 나타난 그들의 한국사랑을 알 게 된 한국인들은 월드컵을 치르는 동안 터키의 홈구장과 홈팬들이 되어 열정적으로 그들을 응원 했습니다. 하이라이트는 한국과 터키의 3, 4위전. 자국에서조차 본 적이 없는 대형 터키 국기가 관중석에 펼쳐지는 순간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수 많은 터키인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합니 다. 경기는 한국 선수들과 터키 선수들의 살가운 어깨동무로 끝이 났고 터키인들은 승리보다도 한국인들의 터키 사랑에 더욱 감동했으며 그렇게 한국과 터키의 '형제애'는 더욱 굳건해졌습니다.

유라시아 대 제국을 세운 몽골족
사마천의 사기에 동호라는 족속이 나오는데 동호는 만리장성 너머 몽골과 만주 일대에 살던 사 람들을 포괄적으로 부른 명칭으로 이 동호에 몽골족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동호는 흉노의 묵 돌선우에게 패한 뒤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어 동호라는 이름은 역사서에서 사라지고 대신에 오 환과 선비로 바뀌어 등장합니다. 당시 독립된 부족으로서의 세력을 갖추지 못하던 몽골족은 그 때로부터 선비족에 포함되어 그 명맥을 잇게 되다가 영웅 단석괴가 죽은 후 탁발, 모용, 유연, 거란, 실위 등의 부족으로 분립하였습니다. 이 실위 족에서 징키스칸이 이끄는 몽골족이 출현하게 됩니다.


여기 다섯 부족 중에 거란 족은 영웅 야율아보기가 10세기 초에 요나라를 건국합니다. 야율아보 기는 907년에 하늘에 천제를 거행하고 칭호를 ‘텡그리 카간’이라 했습니다. 거란 족의 카간은 천 계의 대행자인 천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야율아보기는 몽골고원을 장악하고 발해를 멸망시킵 니다. 거란은 유목민 한족과 여진계, 발해유민, 티베트 계인 탕구르족 등 다양한 족속을 포함하여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이후 12세기 초에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게 멸망합니다. 정확하게 말하 면 금나라로 계승됩니다. 금나라는 여진족과 거란 족이 연합해서 세운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징기스칸이 등장하기 전의 몽골고원은 몽골계, 돌궐계, 퉁구스계가 뒤섞여 서로 경쟁하는 혼란스 런 상태였습니다. 징기스칸은 19세에 몽골계 몽골 울루스 족의 칸으로 선출된 뒤 몽골족을 통합 하고 1206년에 몽골집단 전체의 카간으로 추대됩니다.  울루스는 국가 혹은 백성이란 뜻인데 오 늘날 몽골국가의 이름도 몽골 울루스라고 합니다. 징기스칸은 중앙 아시아 일대를 정복해 나가 그의 아들은 1222-1223년에 아조프해 연안에서 러시아 군대와 싸워 이기고 1223년에는 키에 프 공국을 공격합니다. 징기스칸이 1227년에 죽자 그 뒤 후계자들은 정복사업을 계속합니다. 


2대 카간 오고타이(1229-1244), 3대 카간 구유크( 1246-1248), 4대 카간 몽케(1251-1259), 5 대 카간 쿠빌라이(1260-1294재위)는 정복사업을 계속하여 중국북부의 금나라를 정복하고, 금 멸망 후에는 네 방향으로 영토를 넓혀 나갔습니다. 유럽원정(1236-1242) 후에 중동을 공격하여 카프가즈 지역과 셀주크 투르크를 속국을 삼고 바그다드를 점령하였습니다(1243). 고려 역시 7 차례에 걸친 공격(1231-1270)을 받아 오랜 항쟁을 하다가 결국 몽골의 지배하에 들어갔습니다. 이들이 세운 나라가 오고타이 한국, 차가타이 한국, 킵차크 한국, 일한국들입니다. 인도의 무굴 제국의 무굴도 몽골에서 나온 것입니다.


몽골족은 유일신 천신을 숭배했습니다. 천신을 탱그리라고 하였는데 흉노나 투르크인이 부르는 탱그리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몽골인은 산을 신성시하여 산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징기스칸도 부 르칸칼둔 산에 피신해 있을 때에 매일 그 산에서 제사를 지내고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북방민족 즉 흉노, 선비, 돌궐, 거란, 몽골 등 여러 족속은 우리 한 민족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한 민족의 원류의 하나는 역시 알타이, 천산, 몽골고원을 무대로 역사를 펼친 북방계 민족입니다. 한 민족의 원류가 북방계 민족이라는 사실을 강력히 뒷받침하는 증거는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천손민족이라는 의식, 천신 즉 삼신상제를 숭배하는 유목민 유물, 고구려벽화에서 생생하게 나타나는 기마전사로서의 성격과 형사취수제 관습입니다. 이것은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풍습이라 합니다.


지금까지는 환단고기를 통한 한민족 고대사, 동이족 이동역사에 대해서 살펴 보았습니다. 그리고 제목을 욕단의 후예들이라 했습니다. 창세기 10:30에서 욕단족속들이 메사에서 스발에 이르는 산악지대에서 살았다는 말씀에서 파미르고원, 천산산맥, 알타인 산맥 등 이 지역 전체에 욕단의 13 아들들이 흩어져 살았을 것입니다. 천손민족의식이나 삼신 상제라 했는데 기독교의 삼위 일 체와 구약성경에서 형사 취수제 즉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제도가 이스라 엘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동이족의 관습에서도 있었다는 사실 앞에 한민족 고대사, 동양 고대사, 고조선사를 기독교인으로서 더욱 깊이 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환단고기에서 말하는 고대 한민족의 신앙인 신교(神敎)에 대해 기독교적 눈으로 살펴 보고 해석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신교가 불교, 유교 사상을 지나오면서 도교, 선교, 불교 화 되었고 심지어 무속신앙화 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신교를 기독교적 신앙으로 되돌려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