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리오스

그가 나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

퀴리오스

내영혼의 양식

시편23편

서진35 2009. 3. 22. 04:27

시편 23편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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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역

1 [다윗의 노래]
야훼는 나의 양치기a, 나는b 부족하지 아니하도다. 2 풀이 많은 목초지로 그가 나를 누이시는구나,
쉴 수 있는 물 가로 그가 나를 이끄시는구나. 3 내 목숨a을 그가 되돌이키시는구나,
그가 나를 의의 길들b로 인도하시는구나, 그의 이름을 위해.
4 나 비록 죽음 그림자a 계곡으로 간다고 해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

왜냐하면 당신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 그것들이 나를 위로하기 때문에.b.

5 당신께서 내 앞에 상a을 차려 주시는군요, 나의 원수된 자들 맞은편에서,
당신께서 내 머리를 기름으로 (이미) 바르셨군요b, 나의 잔c이 넘치옵니다.
6 정말로, 좋으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뒤따라오는구나a, 나 살아 있는 날 동안,
나 야훼의 집에 돌아가리b, 길이 길이c.

2. 본문비평과 사역에 관하여

1a. '로이'는 '라아'의 분사형태로 개역, 개역 개정판 감수본(이하 감수본), 표준 새번역, 공동번역 등 모든 한글판 번역본들이 "목자"로 번역을 하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분사의 모습을 드러내고 강조하기 위해 서 "양치기"로 번역하였다.

1b. 개역과 공동번역을 제외하고, 감수본과 표준 새번역은 "내게"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직역해서 "나 는", "내가" 등으로 주격으로 번역을 해도 뜻이 잘 통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맛소라 본문대로 주격 의 의미를 살려서 번역했다.

3a. '나프쉬는 '영혼, 목숨, 삶, 자아, 감정, 열망' 등으로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공동번역(생기)을 제 외한 모든 한글판 번역본들이 "영혼"으로 번역했지만, 이 본문에서는 먹고 마시는 '풀', '물'과 구체적 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목숨"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문맥에 더 잘 어울린다.

3b. '브마으끌레-체데크'를 개역, 감수본, 표준 새번역은 "의의 길"로 추상적으로 번역했지만, 공동번역은 "곧은 길"로, 시편촬요는 "올흔 길"로 각각 번역했다. 여기에서는 '체데크'를 6절의 '좋으심과 인자하 심'과 관련시켜서 "의"로 번역했고, '마으끌레'는 복수형이므로 "길들"로 번역하였다.

4a. '찰마웨트'는 '죽음'(무트)과 '그림자'(찰)의 합성어이며, 관용어이다. 이 단어가 성서의 곳곳에서 등장 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지역의 이름을 나타내는 고유명사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4b. 개역, 감수본은 '키 아타 임마디'와 그 다음 구절을 분리시켜서 번역했다. 그러나 그 다음 구절에서는 운율상의 이유로 '키'를 생략한 문장구조로 보는 것이 의미도 통하고 문맥상 더 자연스럽다. 그래서 하 반절까지 "때문에"로 묶어서 번역하였다.

5a. 비평란에서는 '슐한'이 원래 '셸라흐'(무기, 창)였는데 뒤쪽에 '네게드'와 붙어서 중복오사(dittography) 되어서 '눈'이 붙은 것이 아닌가 추정한다. 만약 이렇게 보아서 읽으면 원수 앞에서 창이나 막대기같 은 무기를 꺼내어 보호해주신다는 뜻으로 의미가 더욱 명확해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지지하는 다 른 번역본들이 전혀 없으므로 여기에서는 본문 그대로 두기로 한다.

5b. '띠샨타'는 '따셴'(기름지게 하다)의 완료형태로, 이 시편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완료형이다. 이것은 단순히 과거시제를 나타내는 완료형이라기 보다는 '상을 차려주시는' 행위에 앞서서 일어나는 사건을 나타내기 위해서 쓰인 완료형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5c. 헬라어 원본문(textus Graecus originalis)에서는 '카이 토 포테리온 수'(당신의 잔)으로 번역한다. 그 러나 굳이 바꾸지 않아도 뜻이 잘 통하고 권위있는 다른 사본들의 지지가 없기 때문에 그대로 두었다.

6a. 모든 한글판 번역본들이 미래형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 시편에 쓰인 다른 미완료 형태처럼 계속되는 상태를 나타내는 미완료의 형태로 보인다. 그래서 '뒤따라오리라'가 아니라, '뒤따 르는구나'로 번역을 했다.

6b. 70인역과 심마쿠스역은 시편 27:4를 참고로 해서 '카이 토 카토이케인 메'(내가 살리라, 거주하리라)로 번역을 하고 있다. 모든 한글판 번역본들도 여기에 따라서 "거하다", "살다" 등으로 번역을 했다. 그 러나 이렇게 바꿀만한 특별한 이유가 없고 그대로 두어도 뜻이 잘 통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맛소라 본문(워샵티)을 그대로 살려서 번역하였다.

6c. '르오레크 얌밈'은 직역하면 "날들의 김까지"이다.

3. 본문의 짜임새

시편 23편의 짜임새를 분석하는 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다. 먼저 크라우스는 이 시를 ① 목자이신 야훼(1-4), ② 주인이신 야훼(5-6)의 2부 구조로 나누고 있다.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전통적인 방법이다. 크레이기도 똑같이 1-4절, 5-6절의 2부 구조로 나누고는 있지만 그 주제에 있어서는 다르다. 그는 전반부의 주제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후반부의 주제에 있어서는 공동체 시편의 기능을 고려해서 각각 ① 목자이신 야훼, ② 하나님의 집에서 감사드릴 것을 앙망함에 대한 것으로 보았다. 이와는 다르게 브릭스는 ① 목자이신 야훼(1-3a), ② 길잡이되신 야훼(3b-4), ③ 주인이신 야훼(5-6)의 3부 구조로 나누고 있다. 더 나아가 젱어는 ① 야훼에 대한 고백/증언(그-나)(1b-3), ② 야훼를 향한 신뢰의 기도(나-너)(4), ③ 야훼를 향한 신뢰의 기도(너-나)(5), ④ 야훼에 대한 고백/증언(나-그)(6)의 4부 구조로 나누어서 교차대구법적인 구조로 보았다. 젱어의 이러한 구분은 상당히 매력이 있는 하나의 시도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를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 있다. 1b-4a절은 4행이 한 단락을 이룬다. 특별히 알파벳 '레쉬', 아인'', '라메드', '알렙'이 각운을 이루는 어구들이 각각 앞뒤에서 포함법(inclusio)을 이루어서 한 단락을 구분하며, 1b절과 4a절의 1인칭 '나'도 양극에서 포함법을 이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2a절의 '전치사구+동사'의 구조는 4a절의 '동사+전치사구'의 구조와 대칭을 이루고, 2b절과 3b절도 마찬가지의 구조로 각각 대칭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전반부는 치밀한 교차대구법의 구조를 보여준다. 한편 이 단락에서는 '풀이 많은 목초지', '쉴 만한 물가', '의의 길', '죽음 그림자 계곡'의 이미지들이 흐름을 주도하며 전반부를 이룬다. 그리고 이 전반부의 결론은 1인칭 미완료를 사용하여 의지나 결단을 나타내는 문장으로 한 단락을 끝낸다. 4b절은 1행으로 한 단락을 이루며, 윗절의 이유를 제공한다. 이 중반부에서는 '막대기'와 '지팡이'의 이미지가 나온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갑자기 주격 인칭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점이다. 4a절까지는 야훼는 3인칭으로 나오지만 여기에서부터는 2인칭으로 바뀌며 5절까지 계속 인칭이 연결된다. 그래서 1행으로 된 중반부의 짧은 단락은 내용으로는 앞단락에 이어지고(물론 나와 함께 하신다는 모티브는 하반절에도 이어지지만 '막대기', '지팡이'의 이미지는 전반부와 이어진다), 인칭으로는 다음단락에 이어진다. 그리고 후반부인 5-6절은 4행이 또한 한 단락을 이루면서 전반부의 광야 분위기와는 다른 전개로 이어간다. 여기에서는 '상', '기름', '잔', '선하심과 인자하심', '야훼의 집' 등의 이미지들이 나온다. 후반부의 결론부 또한 전반부의 결론부과 마찬가지로 1인칭 와우연속완료를 써서 의지나 결단을 나타내는 문장으로 종결하고 있다. 한편 전반부의 4행은 후반부의 4행과 각각 평행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이미지의 병행과 더불어 진행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전반부와 후반부는 4b절이 중심이 되어서 각각의 행과 이미지가 병행되고 있는 추축양식의 특징을 가진다.

1b-4a 나를 인도하시는 야훼(4행) : 풀이 많은 목초지, 쉴 만한 물가, 의의 길, 죽음 그림자 계곡 (3,1인칭)
4b 신뢰의 선포(1행) : 막대기와 지팡이 (2,3인칭)
5-6 야훼의 집으로 향하는 나(4행) : 상, 기름, 잔, 선하심과 인자하심, 야훼의 집 (1,2인칭)

4. 삶의 자리 : 이미지의 상관성으로 본 전승사적 관찰

위와 같이 짜임새를 나누어볼 때, 우리는 하나의 가설을 세울 수 있는데, 1b-4a절과 5-6절이 각각 다른 전승을 기초로 구전되어 내려오다가 4b절의 신뢰의 표현을 중심으로 교묘히 하나로 묶어졌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렇게 23편을 전반부, 중반부, 후반부로 나누었을 때, 전, 후반부가 서로 다른 전승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근거는 전, 후반절에 나오는 이미지의 특징적인 쓰임새 때문이다. 서로 다른 두 전승에 기초한 본문 속에 나오는 이미지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연관성을 가지고 하나로 묶여졌는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절에 나오는 '풀이 많은 목초지'(삐느오트 떼셰)는 5절의 '상'(슐한)과 연관이 된다. 야훼께서 풀이 있는 곳을 찾아 다니시며 인도하시는 모습이 5절에는 상을 차려 주시는 모습으로 전이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인공은 2절의 움직이는 동적인 모습에서 5절의 가만히 앉아 상을 받는 정적인 모습으로 바뀐다. 여기에서 '목초지'는 '나아'(목초지)의 복수형태인데, 이와 비슷한 형태인 '나웨'는 출 15:13에서 '야훼의 성소'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리고 2절의 '쉴 수 있는 물'(메 므누호트)은 5절의 '기름'(셰멘)과 연관이 된다. 이 '기름'은 여러가지 용도로 사용된다. 왕이나 제사장에게 직위를 부여할 때 기름을 붓고, 가나안의 풍습에서 음식을 대접할 때 주인이 손님에게 기름을 부어 쉬게 하기도 한다. 또 양에게 기름을 붓는 의미는 기생충이 자라지 못하도록 예방하는 의미도 있고, 상처난 곳을 치료하는 의미(사 1:6)도 있다. 그리고 속건제를 드릴 때 제사장이 기름을 왼쪽 손바닥에 따르고 오른쪽 손가락으로 기름을 찍어 야훼 앞에 일곱 번 뿌리고 그 손의 기름은 정결함을 받는 자의 오른쪽 귓부리, 엄지 손가락, 엄지 발가락에 바르고, 그래도 남은 기름은 그 정결함을 받는 자의 머리에 발라서 속죄하기도 했다(레 14:15-18, 26-29). 이렇게 기름의 용도가 여러 가지여서 이 본문의 상황이 어떤 것인지는 확실하게 알수는 없지만 제사에 쓰이는 기름의 용도가 가장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설령 후반부가 포로기 이전에 저작되었다고 추정해서 당시의 시의 정황이 제사와 연관되어 있다 하더라도, 포로 시대에는 다른 뜻과도 연관되어 쓰여졌을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 또한 2절에 있는 '목숨'(나프쉬)은 5절의 '잔'(코시)과 연관된다. 건기로 인해서 물과 풀이 귀한 상황에서, 풀을 먹고 물을 마셨기 때문에 시인은 3절에서 "내 목숨을 그가 되돌이키시는구나"(나프쉬 여쇼베브)하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특히 죽어가는 자에게 '물'은 생명이다. 5절의 '잔'도 마찬가지이다. 죄를 지은 몸이 기름을 바른 후 속죄받았다는 것은 다시 생명을 얻었다는 은혜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겠다. 또 포로시대에 '원수' 앞에서 상처입은 곳을 치료받아 생명이 다시 돌아온다는 뜻으로 재사용되었다고 추정하더라도 '잔'은 목숨과 결부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3절의 '내 목숨을 돌이키시는구나'(나프쉬 여쇼베브)하는 언급과 5절의 "나의 잔이 넘침이라"(코시 르와야)는 언급은 서로 연관되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3절에서 뒤이어 나오는 '의'(체데크)는 5절의 '좋으심과 인자하심'(토브 와헤세드)과 연관이 된다. '의'(체데크)가 출애굽 이후 야훼와 그의 백성이 맺었던 신명기적 계약 사상에서 출원하는 개념이라면, '좋으심'(토브)은 창세기 1장(4,10,12,18,21,25,31)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제관계(P)에서 출원하고, 마찬가지로 '인자하심'(헤세드)은 제사에 의해서 계약을 맺은 의미, 곧 제의적인 의미에서 출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4절에서 나오는 '죽음 그림자'(찰마웨트)는 다른 시편 본문에서 44:20, 107:10, 107:14에 나오는데, 이 시편들 모두가 '양'을 언급하고 있거나, '광야 길'을 언급하고 있다. 특히 107편에서는 출애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서 이 단어는 '광야 전승'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이 단어와 반향되어 연관되는 6절의 '야훼의 집'은 분명히 '성전'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집'이라는 단어가 단독으로 사용되면 단순히 가족들이 모여사는 집(house)을 의미하고, '왕'과 함께 사용되면 '왕의 집' 곧 궁전(palace)을 의미하지만, '야훼'와 함께 사용되면 성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출 23:19, 34:26, 신 23:19, 시 27:4 참조). 모빙켈은 '야훼의 집'에서 상을 차려 주시는 상황을 "감사제에서 함께 나누어 먹는 향연"(banquet at a sacrifice of thanksgiving)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성전에 길이 길이 돌아간다, 혹은 거한다"는 말은 성전과 관련되어 있는 순례시의 요소에 포함될 수 있다.

종합해 보면 1b-4a절은 유목생활을 배경으로 하는 광야 전승(신명기적 사상)과 유랑하며 예배를 드리는 역동적인 성소 전승(모세 계약 전승)을 기초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광야 전승은 예언서에서는 예언자의 '유목민적 이상'을 나타내고 있다. 그들은 과거를 되돌아보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야훼와 계약을 맺던 시대를 회상한다(암 2:10, 렘 2:2, 호 13:5). 그들은 옛날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체류할 때 살았던 것처럼 사는 생활로 귀환하는 데에서만 미래에 대한 구원을 보고 있는 것이다(호 6:16f, 12:10). 반면에 5-6절은 정착생활을 배경으로 하는 시온 전승(제왕, 제의적 사상)과 가나안의 영향을 받아서 고정된 곳에서 예배를 드리는 정적인 성전 전승(다윗 계약 전승)을 기초로 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면 이렇게 서로 연관되는 비슷한 이미지를 가지고는 있지만 서로 상반되는 두 전승들이 어떻게 하나로 묶여질 수 있었을까? 북 이스라엘에서는 원래 모세가 중심이 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야훼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계약을 맺었다는 시내 계약 전승과 이리 저리 광야를 옮겨다니면서 야훼께 예배를 드린 광야 전승이 흘러 내려오고 있었다. 한편 남 유다에서는 다윗이 성소에 있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오면서 하나님이 다윗 왕조를 선택하셨다는 다윗 계약 전승과 예루살렘을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선택하셨다는 시온 전승이 이어져 왔다. 물론 양 전승들 간에 완전한 단절은 있을 수 없지만 이렇게 각각 전승되어 내려오다가 일차적으로 북 왕국이 멸망하면서 북 이스라엘에서 명맥을 유지하던 전승들이 남 유다로 옮겨져서 예루살렘의 다윗 전승과 부분적으로 합쳐졌으며, 그 이후 다윗 왕조마저 무너지면서 바벨론 포로시대를 맞이하게 되자 첫 번째 출애굽을 회상하며 두 번째 출애굽을 바라는 실존적인 요망 속에서 광야 전승이 사용되었고, 잃어버린 왕정과 성전을 다시 회복하고자 하는 희망으로 시온 전승이 사용되면서 이 두 전승이 하나의 본문 속에서 융합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었을 것이다. 이러한 배경 위에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한 목자가 '야훼' 그분임을 자각하고(1b-4a), 다시 예배드리는 성전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염원 속에서(5-6), 포로 시대에 전승사적으로 다른 배경을 가진 두 시가 동일한 주제인 '당신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4b절의 정형어구를 축으로 추축양식을 이루며 편집되었고, 1절과 6절에서 '야훼'라는 신명(神名)이 수미쌍관법을 이루어 시편 전체를 감싸면서 더욱 단단하게 하나로 묶여졌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시는 당시 전혀 상반되는 것 처럼 보이는 예언 전승과 제의 전승이 어떻게 연합되었는지 추적하는 좋은 실마리가 될 수 있다.

5. 문학형식

문학형식에 대해서는 궁켈 이후로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신뢰시로 보고 있다. 우리도 또한 여기에 동의한다. 왜냐하면 이 시가 4b의 '신뢰어구'를 축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한편 모티브를 이루는 이미지의 전체적인 흐름이 3절의 '의의 길'과 4절의 '죽음 그림자 계곡'을 거쳐 6절의 '야훼의 집'으로 귀착되고 있기 때문에, 바벨론 포로기 혹은 포로 후기 시대에 성전 밖에서, 내지는 이스라엘 밖에서 이스라엘 성전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순례시라고 볼 수도 있다. 특히 '야훼의 집에 길이길이 돌아가리라'는 표현은 순례시의 전형을 잘 나타내 준다. 그러므로 이 시는 신뢰시일 뿐만이 아니라 순례시의 요소도 가미된 특별한 문학형태를 띄고 있다.

6. 23편의 자리

위의 문학형식에서 볼 수 있듯이 23편은 신뢰시와 순례시의 요소를 모두 간직하고 있다. 이는 23편의 앞, 뒤 시편을 비교해보면 더욱 명확해지며, 23편이 22편과 24편 사이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 알 수 있다. 우선 22편은 하나님(엘, 엘로힘)께 버림받은 탄식의 상황 속에서 조상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사역(5,6)을 회상하고 신뢰의 고백을 거쳐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하면서 찬양으로 옮아가는 탄원시이다. 1-22절 전반절까지는 탄식과 신뢰와 기도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보았을 때, 그 신뢰의 요소중 하나가 바로 시인의 조상이 신뢰했던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다. 이것은 광야 전승 속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인도하시고 먹이신 목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신 7:19, 8:3, 7, 15, 26:9). 바로 이런 전승의 기초 위에서 23편의 첫 구절 '야훼는 나의 목자'라는 고백으로 이어져 나오는 것이다. 곧 22편에서 조상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23편에서는 현재의 나의 목자(야훼)로 전이되는 것이다. 그리고, 22:27에서 먹고 만족하는 주체는 '가난한 자들'인데, 23:2에서는 풀밭이 있는 목초지와 쉴 수 있는 물 가로 인도함받고 먹고 마시며, 부족하지 않다고 고백하는 주체는 '나'이다. '가난한 자들'(객관적)이 곧 '나'(주관적)로 표현되는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주체가 구체화되면서 특정 탄식의 상황 속에 있는 이스라엘 독자들은 더욱 야훼에 대한 신뢰와 확신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22:27에서는 야훼를 찾는 자는 '마음'(레바브켐)이 살지만, 23:3에서는 야훼를 찾은 결과 야훼께서 인도하셔서 '목숨'(나프쉬)이 다시 살아나게 되고, 그것이 더욱 확대되어 6절에서는 '내가 살아 있는 날 동안에' '나'로 표현되는 시인, 혹은 이스라엘이 좋으심과 인자하심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이 '나'를 찾아서 따라오게 된다. 이렇게 볼 때 23편은 탄식 가운데 야훼를 찾는 행위(22편)에 대한 구체적인 적용이며 결론이다. 이렇게 23편은 22편의 다음에 위치해서 22편에서의 신뢰를 더욱 확대, 보강, 귀결시켜주는 기능을 한다.

한편 23편이 24편 앞에서는 어떤 기능을 할까? 24편은 흔히 '입당 예식'(entrance liturgy)때 불리는 시로 구분된다. 24:3에 나오는 '야훼의 산'(브하르 야훼)은 바로 예루살렘의 성전이 있는 산이다(시 2:6). 이 단어는 23:6에서 시인이 길이길이 돌아가고자 앙망하는 '야훼의 집'(브베트 야훼)과 동일선상에서 볼 수 있다. 22:28에서 땅의 모든 끝이 야훼를 기억하고 돌아가서(워야슈부) 경배할 곳이 바로 23:6의 '야훼의 집'이며, 더 나아가 24:3의 '야훼의 산'이다. 이점에서 24:3과 23:6은 모두 순례시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다른 한 편으로, 문맥을 잘 살펴보면 23편을 삭제시키고 22편의 끝과 24편의 시작을 붙였을 때 흐름에 있어서 더욱 자연스러움을 발견하게 된다. 22편 후반부에서 야훼의 왕권이 언급되고(29절) 야훼에 대한 경배가 확대되고 있는데(28-32절), 이 흐름이 24편의 시작부분으로 그대로 이어진다(1-2절). 이렇게 우주적인 야훼 왕권을 선포하는 접속점 사이에 23편이 끼어들어서 야훼는 '나'의 목자, 곧 이스라엘의 목자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우리는 15편부터 24편까지의 관계성을 보아야 한다. 호스펠트와 젱어는 15편부터 24편까지 한 분집을 이루어서 성소로부터 나오셔서 구원하시는 "영광의 왕"과 의인과 곤고한 사람들이 만나는 것이 주된 주제가 된다고 했다. 15:1에서 '당신의 장막'과 '당신의 거룩한 산'에 거할 자를 찾으며 그들이 정직하게 행하는 자라고 결론짓는다(2-5). 그런데 여기에서도 16편을 삭제시키고 17편과 붙여 읽으면 그 흐름이 원활하다. 17:1에서 자신의 거짓되지 않은 입술에서 나오는 기도와 자신의 정직함을 들어달라고 야훼께 기도한다. 이 흐름에 16편이 끼어들어서 야훼만이 '나'의 복이며(2절), '나'의 재산과 잔의 할당된 소득(5절)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23편이 16편과 함께 시편의 최종 편집자의 고유한 신학을 반영하면서 시편 분집 속에 삽입되었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 고유한 신학이란 바로 야훼와 시인, 야훼와 이스라엘의 관계성이다. 16편에서는 야훼 이외에는 자신의 복이 없고(2절),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증가할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4절) 야훼에 대한 끝없는 신뢰와 충성심을 보인다. 23편도 또한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당신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강한 확신과 신뢰를 야훼 앞에서 고백하고 있다. 야곱의 자손(24:6)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포로생활을 했을 때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릴 위험성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바벨론에 사로잡혀 와있는 이스라엘 민족들도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릴 위험성 속에 처해 있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첫 번째 출애굽에서 애굽의 강대 세력을 물리치고 인도해내신 역사의 하나님을 신뢰하고 야훼와 그의 백성 사이에 계약을 맺었던 것처럼 포로 시대에도 새로운 출애굽을 바라보면서 야훼와 이스라엘 백성들간에 새로운 계약을 맺고 관계성을 정립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열방과 우주를 다스리는 야훼 개념 사이에 23편을 집어넣어서 야훼와 '나'(시인, 이스라엘)의 양과 목자의 관계성을 이야기하고, 야훼의 집에 영원히 돌아가서 살겠다는 확신에 찬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다.

7. 본문 해설과 설교를 위한 적용

1) 전반부 : 나를 인도하시는 야훼 (1b-4a)

시인은 시의 가장 첫머리에서 매우 갑작스러운 선언을 한다. "야훼는 나의 양치기, 나는 부족하지 않다"라는 이 선언은 당시 이 시를 읽는 독자들에게는 의아한 선언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다윗 왕조가 바벨론에게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또 독자가 만약 왕족이라면 더더욱 이 선언은 독자에게 상당히 충격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시인은 바벨론으로 잡혀온 것도 목자되신 야훼께서 먹을 것을 주시기 위해서 인도하셨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야훼에 대한 전적인 신뢰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레미야와 에스겔, 제 2이사야의 희망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시인의 이러한 선언은 이 시 전체를 포괄하는 주제가 되며 이스라엘이 경험한 이스라엘 역사를 통털어 한 구절로 요약한 압축문장이다. 이렇게 볼 때 '나'는 시인 자신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이다. 이 문장에 이어서 시인은 왜 야훼께서 나의 목자가 되는지, 왜 내가 부족하지 않는지 하나 하나 증거를 들고 있다. 첫 번째는 풀이 있는 목초지에 누이신다는 것이다. 문장구조를 보면 전치사구가 동사보다 먼저 나온다. 다음 문장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이는 전치사구를 강조하며 3b절과 4a절의 문장구조와 대칭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서 강조되는 '목초지'는 원래 이미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야훼의 인도를 받아서 도착했던 곳(출 15:13), 곧 야훼의 성소, 가나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쉴 수 있는 물 가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목자는 양들에게 풀을 먹이고 쉬게 하기 위해서 먼저 풀과 물이 있는 곳을 답사한다. 목자처럼 야훼는 자신의 양을 위해서 미리 앞서 가신다. 그리고는 좋은 곳으로 백성들을 이끄신 것이다. 이런 고백은 바벨론의 치하 속에 있는 이스라엘 포로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예루살렘이 멸망당한 그 일도,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일도 모두가 야훼께서 한 걸음 앞서가시고 인도하심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그 상황 속에서도 야훼의 인도하심을 깨닫고 "그 분이 내 목숨을 살려주셨다"(나프쉬 여쇼베브)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목적지까지 다다르지는 않았다. 다시 예루살렘 집, 성전으로 돌아가는 길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제 목자와 함께 가는 양은 평탄한 의의 길들로 갈 수도 있고, 죽음 그림자 계곡을 지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야훼께서 자기 이름을 걸고 인도하시기 때문에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고백 또한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의 일들을 회상함에서 오는 것이다(시 106:8).

2) 중반부 : 신뢰의 선포 (4b)

이 단락은 1행의 아주 짧은 단락으로 추축양식에 있어서 전반부와 후반부를 이어주는 교량 역할을 하는 축이자, 이 시 전체의 가장 중심이 되는 주제이다. 시인은 위에서 야훼를 3인칭으로 표현하다가 여기에서 갑자기 2인칭으로 표현한다. 이런 인칭의 변화는 시인이 독백을 하던 중에 야훼께서 찾아오심을 의미한다. 이 상황은 마치 이삭이 흉년의 고통 속에서 애굽으로 가려고 할 때 야훼께서 나타나셔서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가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겠다"(창 26:1-5)고 약속하신 것처럼, 그리고 야곱이 에서에게 쫓겨서 라반에게 도주하다가 광야 한 가운데에서 해가 져서 돌로 베개를 하고 자야하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야훼께서 꿈으로 나타나셔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28:10-17)고 약속하신 것처럼 바벨론으로 쫓겨가서 그곳에서 탄식하는 이삭과 야곱의 후손들, 곧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너를 이끌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할찌라"고 하는 약속을 주셨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외에도 야훼께서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은 항상 어떤 곤궁에 처한 상황, 고통 가운데 있는 비참한 상황에서 나온 약속임을 발견할 수 있다.(창 26:3, 28:15, 31:3, 출 3:12, 신 2:7, 31:6, 시 91:15, 사 41:10 등). 그러므로 "당신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하는 고백과 신뢰는 탄식하는 시인이, 혹은 이스라엘이 야훼의 임재를 체험한 이후에 나온 응답이다. 야곱도 야훼의 약속을 받은 후 잠에서 깨어 이렇게 고백했다. "야훼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다른 곳이 성전이 아니라 이곳이야말로 하나님의 전이다."(28:16-17) 광야에서 야훼를 발견한 야곱처럼 바벨론에서 야훼를 발견한 시인은 포로로 잡혀와 있는 이 곳이야말로 야훼께서 계시는 야훼의 집임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한편 이 시편의 앞, 뒤 시편(22, 24편)을 포함하여 많은 시편(14:7, 53:7, 44:5, 47:5, 85:2, 114:7 132:5 등)과 예언서(사 41:14, 43:1, 44:1, 렘 31:11, 46:27, 겔 37:25 등)에 '야곱'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특별히 이 야곱 이야기는 아마 포로시대에 살고 있던 시인, 혹은 시편의 편집자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이 시의 중심주제가 되는 정형어구 '키 아타 임마디'는 야곱 전승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

3) 하반부 : 야훼의 집으로 향하는 나 (5-6)

4b절에서 있었던 인칭의 변화는 5절에까지 이어진다. 이런 인칭의 변화의 배경은 독백에서 기도로의 전환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야훼의 임재를 체험하고,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고 하는 야훼의 약속을 들은 후 "정말 당신은 나와 함께 하십니다"라는 고백을 드리기까지 야훼와 시인과의 관계성이 재설정되고 급속하게 친밀해졌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제 야훼를 체험한 시인의 고백은 전반부의 고백과 이미지를 맞추어 전개된다. 그런데 후반부에서는 1b-4a절에서 이야기하던 분위기와는 다른 분위기로 이끌어간다. 하반부에서 나오는 배경은 전반부와 같이 목자가 양을 인도해서 '길'을 가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 마치 손님이 되어 대접을 받고 있는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크라우스는 이 현상을 야훼께서 괴롭힘 당하는 자를 피난처로 데려 오시고 상을 베풀어주시는 자비로운 주인으로 묘사하는, 전적으로 새로운 장면이라고 보았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이미 앞에서 이런 장면의 변화가 전승의 차이 때문이라고 추정해 보았다. 하지만 전반부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표현될 뿐이지 그 내용에 있어서는 이미지가 서로 이어지고 있어서 다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풀'과 '물'과 '목숨'이 '상'과 '기름'과 '잔'으로 대체되어 나타난다.

이제 6a절에서 시인은 "좋으심과 인자하심이 자신을 뒤따라오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여기에서 '뒤따라오다'(라다프)는 단순히 제자가 스승을 따르듯이 따라온다는 의미가 아니라 마치 자신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는 적군이 자신을 죽이려고 추격해오듯이 뒤쫓아온다는 의미이다(암 1:11, 호 8:3, 신 32:30, 창 31:23, 35:5 등). 이것은 주체가 움직이는 전반부의 이미지와는 달리,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주체를 뒤쫓아오는 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점만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이 단어를 사용하면서 이미 5a절의 '원수'(초르라이)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원수가 누구인지는 확실하게 정의할 수는 없으나, 이전까지는 원수들이 나를 죽이려고 뒤쫓아왔지만 이제는 원수 대신에 좋으심과 인자하심이 자신을 뒤쫓아온다는 고백인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서 시인은 6b절에서 전반부 끝부분에서처럼 인칭을 옮겨서 1인칭으로 소망이 담긴 결단의 표현을 한다. "나 야훼의 집에 길이 길이 돌아가리." 여기에서 '야훼의 집'(브베트 야훼)이 성전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과 이 시편이 원래 제의적 용도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 정형어구가 제사를 드릴 성전이 없어진 포로시대에는 단지 제사를 드릴 곳만이 아니라 예루살렘, 곧 잃어버린 고향을 의미할 수도 있다. 어쨌든 야곱이 벧엘 광야에서 "야훼께서 나타나신 여기가 바로 야훼의 집이다"라고 고백했듯이 시인과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야훼께서 인도하시고, 임재하신 바벨론이 현재의 야훼의 집이 될 수 있지만, 그래도 영원히 돌아갈 최종 목적지는 야훼의 집, 예루살렘인 것이다. 그러므로 탄식의 현장 속에서 야훼의 임재를 체험하고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야훼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당신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는 고백을 하게 되고, 그때에야 비로소 소망없는 현실 속에서 앞을 내다보는 비젼과 소망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 참고문헌

1) 주석 및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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